밀라노에서 데미나가 던진 구찌의 새 정의
데미나가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자리를 옮긴 지 한 해를 채운 시점에, 2027년 봄·여름(SS27) 컬렉션으로 처음으로 자신의 전체 비전을 내놓았다. 발렌시아가를 오래 이끌며 스트리트와 하이패션의 경계를 지워온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극단, 즉 이탈리아 헤리티지 하우스의 정점인 구찌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업계의 시선이 쏠려 있던 자리다. 밀라노에서 열린 이번 쇼의 제목은 '더 스토어(The Store)'였고, 그가 취임 첫 해를 하우스의 역사와 코드를 연구하는 데 썼다고 밝힌 만큼 이번 쇼는 단순한 시즌 컬렉션이 아니라 그가 구찌를 어떻게 읽어냈는지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명료하다. 구찌는 더 화려한 세계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과, 그 세계를 자기 방식대로 다시 만들어버리는 대담함 사이의 긴장에서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로고나 로퍼, 특정 색조 같은 표면적 상징이 아니라 이 긴장 자체가 하우스의 정체성이라는 재정의는, 후계자가 바뀔 때마다 이번엔 구찌가 어느 쪽으로 가는가를 지켜보던 업계와 소비자 모두에게 명확한 좌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취임 첫 해를 관망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스스로 정리한 답을 들고 나온 시점이라는 것 자체가, 이 쇼를 단순한 신작 발표 이상으로 읽어야 할 이유다.
무엇이 달라졌나
컬렉션의 골자는 구찌라는 하우스를 관통하는 두 축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다. 데미나는 구찌가 단정한 부르주아적 격조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오래 기억되는 순간들은 그 완벽한 표면을 흔든 기행과 위험, 섹슈얼리티가 끼어든 장면들이었다고 짚었다. 즉 브랜드의 역사는 옷 자체보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의 개성과 생활방식이 만들어온 것에 더 가깝다는 관점이다. 그는 이를 두고 구찌가 귀족적인 것과 팝 컬처 사이, 피렌체와 할리우드 사이, 헤리티지와 대중적 욕망 사이를 오갈 수 있는 하우스라고 정의했다. 이 틀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데미나가 두 축 가운데 하나를 정답으로 고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헤리티지 하우스들이 위기 때마다 과거 아카이브를 그대로 복각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젊은 감각으로 갈아엎는 양자택일에 가까운 선택을 해왔다. 데미나의 결론은 그 이분법 자체를 하우스의 서사로 흡수하는 쪽이다. 정통 테일러링과 팝적인 과잉, 아카이브적 절제와 대중적 노출이 한 컬렉션 안에서 공존하도록 설계했다는 뜻이며, 구찌를 특정 무드보드나 실루엣 하나로 좁히지 않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도 알아볼 수 있는 코드는 유지하는 움직이는 그릇으로 재정의한 셈이다. 취임 첫 해가 관찰과 학습의 시간이었다면, 이번 SS27은 그 관찰을 뼈대로 세운 첫 실행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즌들과 선명하게 구분된다.
왜 지금인가
이 시점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최근 몇 년간 명품 업계 전반이 겪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 흐름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우스마다 새 디렉터가 오면 초반 한두 시즌은 과거 코드를 조심스레 훑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사이 브랜드 정체성이 흐릿해진다는 우려가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데미나가 취임 후 곧바로 전면적 변화를 던지지 않고 스스로 연구의 해를 선언한 뒤 이번에야 완전한 비전을 공개한 방식은, 급한 매출 반등보다 장기적 정체성 재구축을 우선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하우스를 보유한 그룹 입장에서도 구찌의 반등이 절실한 시점인 만큼, 이번 발표에 걸린 기대와 부담은 그만큼 크다. 영감의 출처로 런던 사보이 호텔을 짚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창업자 구찌오 구찌가 이 호텔에서 귀족과 예술가, 크리에이터들이 뒤섞이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일화를 다시 꺼낸 것은, 지금의 럭셔리 소비자층 역시 전통적 상류층 고객과 새로운 팝 컬처발 소비층이 뒤섞이는 시기라는 점과 겹쳐 보인다. 하우스의 기원 서사를 오늘의 소비 지형과 나란히 놓으면서,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지에 설득력을 더한 셈이다. 결국 이번 컬렉션이 놓인 시점은 개인의 취임 일정이 아니라, 헤리티지 럭셔리 전체가 다음 세대 소비자에게 무엇으로 다가갈지를 다시 묻는 국면과 맞물려 있다.
다음에 볼 것
'더 스토어'라는 제목 자체가 예고하는 바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데미나는 이 컬렉션을 통해 구찌를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으로,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제시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는 앞으로의 캠페인이나 매장 경험, 컬래버레이션에서 이 '누구나 소속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체적 형태로 옮겨질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하우스 홈페이지에 공개된 룩들을 통해 이번 시즌의 실루엣과 소재가 이 개념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했는지 먼저 확인할 수 있고, 통상 봄·여름 컬렉션이 이듬해 초부터 매장에 순차 입고되는 흐름을 감안하면 이 비전이 실제 제품으로 소비자 손에 닿기까지도 시간을 두고 지켜볼 만하다. 이후 이어질 프리 컬렉션이나 매장 리뉴얼에서 '더 스토어'의 공간적 은유가 실제 리테일 경험으로 얼마나 번역되는지가 다음 관찰 지점이다. 취임 첫 해를 연구로, 두 번째 해를 선언으로 썼다면, 세 번째 시즌부터는 이 비전이 매출과 브랜드 지표로 얼마나 이어지는지가 업계 전체가 주목할 다음 장이 될 전망이다.



